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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읽는 세상 6] 다시 엄마를 공부하는 특권의 시간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10/2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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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비담 시인. 한국작가회의     ©화성신문

“할말~이 하~도 많아 하고파도 못합니~다. 이 몸이 철새라면 이 몸이 철새라면 뱃길에 훨훨 날아 어데론지 가련만은…”

 

즐겨 부르시던 노래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인데 스마트폰으로 틀어드려도 마치 모르는 노래인 양 멀뚱멀뚱하시더니 2절이 시작되자 드디어 입술을 옴싹이며 따라 부르신다. 드라이브를 좋아하시는 엄마를 오빠가 운전하는 차에 태우고 낙동강변 다산 은행나무숲을 오른쪽에 두고 달릴 때였다. 펜타닐 진통제 후유증으로 엄마는 뇌의 회로가 엉키고 설켜서 시시때때로 어디 다른 세계에 다녀오신 듯 지독한 섬망증세를 보이곤 한다. 87년을 사시면서 엄마는 장염으로 한 이틀 입원하신 것 말고는 평생 단 한 번도 중병을 앓아본 적 없다. 대가족을 돌보며 돌봄 받는 일 따위 없이 늘 씩씩했던 엄마는 자식들에게 짐 될까 폐 될까 억척스럽게 스스로 잘 돌봐 오신 역전의 여장부다. 

 

그 엄마가 노화로 인한 담도암 말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병에 걸렸다. 치료 불가능, 아니 치료 불필요라고 의사가 선고했다. 다복한 자식들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의논하는 차에 앞뒤 잴 것도 없이 덜컥 간병을 자청하고 나섰다. 

 

   

가스 불에 사골을 안치고/저녁을 읽는다/엄마가 끓기 시작하는 저녁//엄마가 많이 아픈데 노환의 암덩어리여서 수술이 필요 없대요. 수선이 필요 없어진 구두처럼 이제는 영락없는 일이라네요. 더 이상 치료가 필요 없어진 삶을 뭐라 이름 지을 수 없어서 조미미의 바다가육지라면을 신청합니다. (중략)//케이비에스 가요무대에 노래를 신청했다/죽은 자와 곧 죽을 자들의 뼈가 가지런히 도열한/삶의 서가 앞 의자에서/엄마의 목숨이 졸아든 책을 펼쳐 들고//뼈들의 음성을 기다리며/곰탕이 끓는 저녁에 코를 대면/살아 있는 엄마 냄새가 나곤 했다//엄마의 딸로 나고 자란 내 생애는/엄마의 뼈가 다글다글 끓는 바다의/저녁이었다//엄마를 끓이며 나는 늘/모조리 뒤늦었다 -전비담 시 「모조리」

 

 

엄마의 뼈가 졸아드는 다 저녁때에 와서야 깨닫는 뒤늦음은 우리 불초한 자식들 대부분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엄마가 주무시고 있으면 무단히 불안해져서 엄마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대어 숨쉬는 엄마를 확인하곤 남몰래 안도하던 막연한 불안을 이젠 엄연한 불안으로 떠안는 시간이 왔다. 언제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를 '임종 시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들을 공부하며 병구완을 한다. 정성들여 밥상을 차려 올리고 때때로 드라이브를 하며 유쾌해진 엄마와 죽음의 일은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깔깔대기도 하지만 언제 어느 순간 어찌 될지 종잡을 수 없이 위중한 엄마 곁을 지키며 천근인지 만근인지 무지근해진 왼쪽 가슴을 부여잡는 시간, 힘이 부쳐서 노인요양간병 제도에 대해 이리저리 알아보지만 자식만이 누릴 수 있는 부모님 돌봄의 이 귀한 특권을 쉽사리 요양병원에 내어줄 수는 없는 일이란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엄마, 엄마… 불러볼 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병든 부모의 마지막 시간에 제 육신의 근원인 부모의 살을 만지고 쓰다듬으며 일생이 축적된 정신의 슬하에 다시 깃들어 부모님 마지막 인생관의 고백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일은 세상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자식의 특권이다. 자식이 부모의 마지막 길을 직접 배웅하는 일이 잘 구비된 요양간병시스템보다 덜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사람의 일에 효율성만이 절대적 가치는 아닐 것이다. 최후의 엄마와 직면하여 다시 엄마를 공부하는 특권의 이 시간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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