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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홍난파 다시보기(4)최초의 음악잡지 ‘삼광’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10/2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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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성 홍난파합창단원 / 시민기자.     ©화성신문

홍난파는 일본 유학 중이던 1919년 2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 ‘삼광(三光)’을 창간하였다. 일제강점기 동경(東京)에서 홍난파가 편집 겸 발행인으로 발간한 삼광(三光)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삼광은 음악, 미술, 문학의 3개 분야 예술을 주체로 한 순수 예술잡지라고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주로 음악 분야를 다루고 있었다. 아울러 재동경조선유학생악우회(在東京朝鮮留學生樂友會) 라는 단체의 기관지 성격을 띠었으나 실제로는 홍난파가 여러 다른 이름으로 지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라고 알려진 ‘창조(創造)’의 창간이 1919년 2월 1일이므로 그로부터 불과 9일 후에 홍난파가 삼광을 창간하였다는 것은 그가 우리 민족을 계몽하고 시대를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선구자였던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 조선은 깨는 때 올시다. 무엇이던지 하려고 하는 때 올시다. 할 때 올시다. 남과 같이 남보다 더 낫게 할 것이올시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부자유에서 자유로 나가야 합니다. 퇴폐(頹敗)한 구습(舊習)과 고루한 사상을 타파하고, 새 정신 새 사상 훌륭한 욕망 위대한 야심을 집어넣어야 할 것이외다. 그리하여 우리의 실력을 건전하고 충실하게 양성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 악우회(樂友會)의 출생된 동기(動機)이며, 삼광(三光)을 우리 손으로 쓰게 된 까닭이라 합니다.  <중략> 비노니 우리 2천만의 형제여, 같이 힘쓰십시다.”

 

창간호에서 홍난파는 ‘음악이란 하오(洪永厚)’, ‘인문발달의 3대 시기(Y,H,生)’, ‘음악상의 신지식(蘭坡)’, ‘부슬비 오는 밤(쏠파生)’, ‘서울계신 K형께(ㄷ,ㄹ,ㅁ)’, ‘금패의 행방(都禮美)’, ‘바람과 빗(ㅎ,ㅇ,ㅎ)’,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소설 ‘POOR FOLK’를 번역하여 ‘사랑하는 벗에게(도뤠미生)’로 연재했다.

 

서양음악을 도입하여 조국에 널리 보급하려고 애를 쓰던 홍난파는 현실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기 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신념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불타는 열정이 있었기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3.1 독립운동의 미완이라는 암울한 현실에서 ‘삼광’ 이라는 예술잡지를 통해서 민족을 계몽하려고 발버둥 쳤다.

 

삼광 2호에서 홍난파는 ‘권두소언’, ‘창가유희의 교육상 효능(洪永厚)’, ‘사랑하는 벗에게(도스토예프스키 作, 도뤠미生 譯)’, ‘음악일화(蘭坡生)’, ‘월광의 곡(秋江生)’을 발표했다. 홍난파는 잡지에서 독자들에게 모처럼만에 어렵게 나온 잡지가 없어졌던 것이 다시 회생한 것만 기특히 여겨서 애호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삼광 3호에 홍난파는 ‘음악상 음의 해설(洪永厚)’, ‘빈인(도스토예프스키 作, 도뤠미生 譯)’,‘석왕사유기(蘭坡生)’, ‘처녀혼(都禮美)’ 등의 글을 썼는데 음악이론, 번역, 기행문, 창작소설 등의 다양한 문필을 다루고 있다. 삼광은 3호까지 발행하고 계속 이어지지 못했지만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 동경 하늘 아래에서 식민지 우리 민족을 깨우치고 계몽하려는 청년 홍난파의 시도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후 홍난파가 보여준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도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결국 삼광은 서양음악의 선구자 홍난파가 예술이라는 소재와 잡지라는 도구로 나타내었던 민족을 사랑하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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