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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213]
어디를 보고 원망하는가?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11/1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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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 민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HK연구 교수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술에 취한 20대 남성이 여성 아르바이트생을 무차별 폭행했다는 뉴스를 봤다. 자신을 “남성연대”라 밝힌 이 청년은 “머리가 짧은 것을 보니 페미니스트 아니냐”면서 “페미니스트는 좀 맞아야 한다”고 외치며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기사가 전해지자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이번 일을 빌미로 또다시 페미니스트들이 설치게 됐다”는 류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대체 저 남성들은 자기 삶의 어떤 현실이 여성이나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피폐해진 자신의 생활을 절벽으로 내모는 사회적 원인이 여성(혹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있다고 판단한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일까? 원망의 이유가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다. 

 

젊은(?) 남성들의 어긋난 원망은 비관적인 경제 상황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여전히 상당수의 남성들은 자신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그에 반해 가족부양의 의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상상(!)’되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취업시장에서의 가혹한 경쟁만 부추기는 결과를 야기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듯싶다. 

 

이들에겐 50대 이하 맞벌이 가구의 비중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통계청의 발표보다는 남성의 능력에만 의존하며 ‘명품백’이나 걸치고 다니는 허영 많은 여성의 과잉 대표된 이미지만을 반복 소비할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그림자 노동”이나 사회적 재생산에 소용되는 여성의 삶 따위는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 어떤 정책적 비전이나 제도적 필요보다 ‘여가부 폐지’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여기는 남성들의 무지성적인 원망과 폭력의 확산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지 이제는 두려울 지경이다. 

 

“PC 묻었다”는 표현이 있다. ‘남초 사이트’에서 영화나 드라마, 게임 등의 콘텐츠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주로 동원되는 말이다. 이때 PC란 “Political Correctness”의 준말이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을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 인종과 성별, 종교, 성적 지향, 장애, 직업 등에서의 차별을 철폐하고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성들이 대체로 “PC 묻었다”라는 말을 할 때는 흑인이나 동성애자들이 작중에서 무맥락적으로 등장할 때를 지칭한다. 그러니까 소수자의 인권 보호 같은 정치적 캠페인을 예술·문화 콘텐츠에서까지 자신들에게 강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적 기본권과 소수자의 인권 보호라는 당위를 ‘강제된 것’으로 재인식(?)하고 있다. 가령 동성애자들이 성정체성의 ‘다름’을 주장하듯, 자신들 역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일종의 ‘혐오할 권리’ 혹은 ‘(혐오)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격인데, 사실 이런 태도는 대단한 사회적 의식 속에서 형성된 것도 아니다. 남성들의 일상에서 “PC 묻었다”는 것은 겨우 자기가 즐기는 게임의 여성 주인공이 못생겼다고 징징대는 것 이상의 사고와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한심한 현실을 못 믿겠다면 지금 당장 주요 포탈에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라는 게임을 검색해 보기 바란다. 진짜로 적지 않은 남성 유저들은 (게임성과는 무관하게) 그저 여성 주인공이 못생겨서 싫다는 진지한 투정을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파시즘을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의 악감정에 의거하는 정치”로 정의한 바 있다. 인간에게는 누군가를 돕거나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좋은 감정이 있는 반면, 타인을 질시하거나 증오하고 원망하는 나쁜 감정도 있기 마련이다. 이때 좋은 감정의 확산을 지지하고, 나쁜 감정을 억제키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의 상식일 텐데, 이와는 정반대로 흐르는 경향이 사회를 지배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꼭 그런 것 같다. 자기의 피폐한 현실을 납득하기 위해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을 탓할 뿐인 이런 어긋난 원망의 연쇄를 끊어줄 정치가 필요하다. 권력을 쟁취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악감정을 이용해 먹으려는 정치 모리배들을 하루빨리 식별해야만 한다. 어디를 보고 원망하는가? 파시즘은 우리의 문전 앞에 당도해 있다. 

 

with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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