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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홍난파 다시 보기(5) 끝.3·1독립운동과 홍난파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11/1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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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성 시민기자.     ©화성신문

홍난파는 1918년 21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고등음악학교에 입학을 한다. 이 학교는 동경에 있는 우에노 공원에 있어서 우에노 음악학교라고 부르는데 현재의 동경예술대학을 말하며 홍난파는 이 학교의 음악학부 예과에 입학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니스트 김영환과 ‘사의 찬미’를 불러 유명했던 윤심덕도 유일한 관립학교인 동교출신이다.    

 

홍난파는 이듬해 3월에 예과를 수료하고 본과로 진급하자마자 일신상의 사정으로 중도에 학교를 자퇴했다. 1931년 2월 조선일보에 홍난파는 이때의 심정을 ‘유모레스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모처럼 들어갔던 동경음악학교만 하더라도 만세통에 튀어나오지만 않았던들 관립학교란 큼직한 간판 밑에서 대도(大道)를 횡보(橫步)했을 것이요,”

 

홍난파는 부친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음악공부를 하러 갔으나, 식민지 조국에서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는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던지 그렇게 공부하고 싶어 했던 음악학교를 자퇴하고 조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홍난파는 조국으로 돌아와 신문사 객원기자로 글을 연재하기도 했으며 주로 중앙기독청년회(YMCA) 회관에서 열리는 각종 음악회에 출연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홍난파는 기미년 그해에 미국 유학의 길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2년 후에는 역시 음악공부를 계속하려고 독일 유학을 추진하였으나 당시에는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 홍난파는 1936년 7월 잡지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던 바로 뒤에 나는 미국 유학을 해보겠다고 섣불리 여권 청구를 했다가 실패를 하고, 2년 후에 다시 독일 여권을 주선하다가 또한 실패를 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양행(洋行)이란 것은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또 혹시 이다음에 사주팔자가 좋아서 백만장자나 된다면 그때에는 별문제려니와 그렇지도 못한 나로서는 부질없이 양행이란 허울 좋은 이름 아래에서 팔자에 없는 객고(客苦)를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서양에서 음악공부를 하겠다는 꿈을 키우며 노력해 온 홍난파는 193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시카고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민족단체인 미주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신한민보 보도에 따르면, 홍난파는 1932년 3월 미국에서 대한국 국민회 시카고 지회 주최로 한인교회당에서 열린 13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연설한다.

 

이 신문은 ‘조선악단의 거성이며 또는 웅변가인 홍영후 씨’라고 소개하였으며 홍난파가 한 3·1절 기념 연설에 대해서 회장에 가득 모인 사람들은 홍영후 씨의 열변에 감격한 바가 많았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기념식에서 홍난파 연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지혜가 왜놈 인종들보다 특수한 점을 들면서 우리의 살 길은 우리들의 민중 가운데에서 우리들 집단과 각 개인에게서 산 정신만을 빼앗기지 않았다.” “현재 조국에서는 해외 특히 미주에 있는 동포들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큰 만치 미주 한인들은 각별히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달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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