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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의 산(19) - 탑재산,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던 산
이경렬 시인, 화성지역학 연구소 연구위원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8/08/2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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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렬 시인, 화성지역학 연구소 연구위원    ©화성신문

탑재산(66.8m)은 제부도의 서쪽 해안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현지인에 의하면 원래 제부도는 서쪽의 탑재산과 동쪽의 당재산, 그리고 남쪽 매바위 방향의 동미산으로 되어 있었다. 갯벌로 연결되어 있는 여타의 작은 섬 몇 개와 함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차차 간척이 되어 농사를 지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된 것은 한국전쟁 때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정착한 이후라고 한다. 

 

탑재산에 올라서 보면 제부도가 지리적으로 매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부항 앞을 지나 그 유서 깊은 마산포, 화량진, 당은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탄도 방조 제로 막혀 있으나 예부터 서울로 가는 조운선의 물길이 이 제부도 앞을 지나는 마산포 항로, 대부도 서쪽을 지나는 항로, 영흥도 서쪽을 지나는 항로가 있었다.(해동지도 참조) 그런데 마산포 항로 가 서울로 가는 가장 가까운 내륙 항로이면서 조운선이 육지와 섬 사이를 가장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닌 항로였다고 한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민비는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게 된다. 이 때 청나라의 북양함대 4척에 3,000여명의 군 사가 마산포로 상륙하게 된다. 이 역시 제부항을 거쳐 마산포에 가는 수로를 이용하였다.

 

임오군란 한 달여 만에 흥선대원군은 납치되어 청나라로 압송을 당한다. 위안스카이라는 26세의 젊은 청나라 군관에게 납치되어 이 마산포로 끌 려올 때 대원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마산포에서 하룻밤을 겨우 보내며 대원군은 어떤 참담함을 느꼈을까. 청나라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압송당할 때 대원군은 누에섬을 보며 지났을 것이고 제부도 탑재산을 뒤돌아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탑재산 전망대에서 서쪽 바다를 바라보면 몇 개 의 섬이 떠있다. 가까이로는 입파도가 있고 그 뒤 로는 풍도가 보인다. 그 오른쪽 멀리로는 여러 섬 들과 덕적도가 희미하게나마 줄지어 배치되어 있 다. 이 섬들은 경기만 일대의 바닷길에 울타리가 되고 기항지가 되는 섬들이다.

 

1894년 4월, 전라도 고부에서 발발한 동학농민 봉기는 마침내 전주성까지 점령한다. 그러자 또 망 국의 민비와 그 척신들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다. 이에 따라 청군이 들어오고 텐진조약에 의거 일본군도 잽싸게 들어온다. 임오군란 때 원한을 지닌 일본은 청군을 물리칠 기회를 포착한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풍도 앞바다에 있던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기습한다. 청일전쟁의 시작이며 대한제국이 몰락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낡은 함선의 청군은 궤멸되고 이어서 성환, 평양 등에서 일본은 연전연승하며 중국 대륙으로까지 진출한다. 우리나라 땅에서 외국군끼리의 전쟁이고 대한제 국이라는 고깃덩어리를 놓고 벌인 두 마리 맹수의 싸움이었다. 

 

아마도 당시의 제부도 주민들은 저 앞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전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도무지 누가 왜 전투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아니면 안타까 워하면서 보았을 것이다. 승리한 일본군이 아산만으로, 여기 제부도를 지나 마산포로, 강화로, 서울로 가는 모습을 가슴을 치며 통탄하지는 않았을까.

 

역사적 사실은 잠시 잊고 탑재산을 한 바퀴 돌아보자. 항구쪽의 해수욕장이 끝나는 지점부터 해안산책로가 잘 설치되어 있다. 산책로 옆으로 탑 재산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중간에 전망대가 보이는 곳으로 오른다. 100여개의 계단을 오르면 바로 능선길이고 정상을 향하게 된다. 중간 중간에 숲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해수욕장도 한 눈에 들어오며 제부도 서쪽 방면을 잘 조망할 수가 있다. 입파도, 풍도, 이작도, 등 보이는 섬을 확인하며 천천히 산책하듯 경치를 관망하면서 30분이면 정상에 이른다. 출발지에서 약 600m 거리이다. 

 

정상에서 조금만 더 가면 북부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제부항과 누에섬, 그리고 육지와 전곡항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제부항에서 전곡항을 거쳐 마산포로 가던 옛 수로의 흔적이 보인다. 먼 신라 시절에는 영화를 누렸던 당성이 보인다. 마산포와 화량진성(와룡산)도 보인다. 

 

저 아래에는 수많은 횟집과 펜션이 자리잡고 있어 옛날의 흔적은 없다. 제부항은 점점 개발되고 있고 최신의 요트와 유람선이 점점이 떠 있어 평화롭고 활기차다. 시대가 발전하고 변한만큼 역사적 사실은 희미해진다. 역사의 아픔과 슬픔도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다. 이렇듯 여기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역사를 모른다.  

 

정상부에서 내려오는 길은 좀 가파르다. 그러나 산 중턱까지 펜션 건물이 늘어서 있어 길이 뚜렷하고 10여분이면 편하게 내려온다. 내려오면 탑재 산 안내판이 있고 치안센터가 있다. 치안센터에서 50m지점에 왕지물이란 곳이다. 

 

화성시사편찬회에서 채록한 기록을 보면, 인조가 충청도로 피난 갔다가 오던 길에 배가 풍랑을 만나 제부도에 잠시 정박했는데 인조가 산에 올라가 탑을 쌓았다고 하여 탑재, 임금이 앉았던 자리는 왕진물이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지인의 말에 의하면 우물이 있던 왕지물은 지금 은 말라 있어 우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큰 참나무가 한 그루 있어 짐작할 뿐이다. 또 건너편 당재 산 아래에 왕이 물을 떠달라고 해서 마시던 ‘한우 물’이 있는데 지금도 당재산 아래에 작은 못으로 남아있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이리로 피난한 기록도 없고 (혹은 선조라고도함.) 혹시 이괄의 난 때 공주로 피난 갔다가 돌아올 때라고 하지만 이 역시 근거 없는 말이며, 광개토대왕이 남하하면서 머물렀다는 전설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제보자들이 구전하던 이야기에 수사가 덧붙여 내려오면서 정착되었으리라고 판단한다.

 

이제 왕진물에서 제부항으로 향한다. 항구를 지나면 해안 단애를 옆으로 끼고 산책로가 잘 설치되어 있다. 길이가 830m라고 한다. 곳곳에 포토존과 시설 안내판이 잘 되어 있다. 경기만의 모든 뱃길이 다 보이는 곳이며 인천항으로 가는 커다란 배도 보이고 전곡항과 제부항을 들락거리는 모든 배들을 볼 수 있다. 선감도와 대부도 사이의 너른 갯벌과 수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부도가 중심에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안의 탑재산은 역사의 기록을 다 알고있는 듯 의연할 뿐이다.  

 

(ykl5712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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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18/09/25 [10:07] 수정 삭제  
  화성시 에도 가야할 산이 108 개로 나오네요 탑재산 소개 감사 드리며 전부 답사하고 후기 모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경기도 에도 가야할 산이 300 여개 정도 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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