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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읽는 세상 10]그라인다드랍의 세상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4/03/1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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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비담시인. 한국작가회의 화성시지부     ©화성신문

북대서양의 덴마크 자치령 페로제도에서는 매년 여름(6~9월)에 ‘축제’가 열린다. 

 

들쇠고래(pilot whale)를 대량 도살하는 고래사냥 축제, 그라인다드랍(grindadrap)이다. 

 

그라인다드랍이 시작되면 여러 척의 사냥 어선과 헬리콥터를 동원해 반원형 대형을 짜고 고래들을 해변으로 몰아간다. 고래들은 모터보트의 요란한 엔진 소리에 쫓겨 도망가다가 얕은 해안가에 이르러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 주민들은 이때를 기다려 갈고리·칼·작살 등 무기를 들고 함성을 지르며 고래에게 달려든다. 고래의 숨구멍에 갈고리를 걸어 밧줄로 잡아당기고 작살이나 칼로 목을 찌르거나 베어 도살한다. 고래는 비명을 지르며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바다는 순식간에 검붉은 피로 흥건해진다. 이 끔찍한 피바다에서 어린아이들까지 뛰어다니며 사냥과 도살을 배우고 즐긴다. 이렇게 포획된 고래고기는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분배되어 식품으로 가공되거나 동물성 기름 제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다. 이 행사로 연평균 약 700마리의 고래가 죽는다.

 

환경단체나 동물보호단체들은 무자비하고 잔인한 학살이라고 비난하며 이 연례행사를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페로제도 정부는 700년간 이어져 오고 있는 이 고래사냥이 주민의 생계 수단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의식을 높여 섬 사회의 응집력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문화와 전통’이기 때문에 폐지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과거 척박했던 페로제도의 주민들에게는 단백질이 풍부한 고래가 유효한 영양공급원이었겠으나 지금은 먹거리도 풍부하고 식품 보급도 수월해졌다. 그런데도 문화와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고래 학살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원시사회에서는 사냥이 생존을 위한 필수 수단이었다. 사냥감의 고기는 식량이 되었고 가죽은 옷감이 되었으며, 뼈·뿔·발굽 등은 도구와 연장을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사냥이 인간 생존 수단의 유일한 자리에서 밀려났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집단활동을 유지하고 명예를 얻고 전통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사냥을 해왔다. 

 

그런데 사냥으로 함양되는 ‘공동체 의식’은 실은 얼마나 배타적이고 반공동체적인가. 누군가를 죽이고 성립하는 공동체 의식은 그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형용모순이다. 사냥의 ‘문화와 전통’으로 일깨워진 공동체 의식·집단의식 속에 계승되어 온 폭력과 도살의 DNA가 지금 인류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무수한 젊은이들과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사냥되고 있다. 전쟁은 인간 폭력성의 DNA를 구현하는 야만의 인간사냥일 뿐 어떤 정치·문화·전통의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워도 구차할 뿐이다. 권력 게임에 빠져 허우적대는 눈먼 자들만 빼고 모든 전쟁은 모두에게 무의미하다. 인류공동체는 목이 터져라 전쟁을 폐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멈추질 않는다. 그 ‘유구하고 자랑스런 사냥 축제의 전통’이기 때문인가. 정말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가.

 

 

 

고래를 잡고 있는 것이다 저 일몰/ 피를 흘리는 초록바다/ 시계탑을 튕겨나와 내리꽂는 붉은 작살// 찢어발긴 바다가 어둠의 근육질로 굳어가고/ 우리는 날마다/ 시청 앞 잔디광장의 의식(儀式)을 할당받는다// 스스로 부추겨 제물이 되는/ 초록의 붉은 파도 매캐하구나// 각자의 번제/ 분배받은 고기로 기름진 저녁을 뜯어먹으며/ 결국 아무도/ 솟구쳐오를 줄 모르는 고래고기 되지/ 시계탑의 사타구니를 기어다니며// 구호와 호구의/ 저녁 식탁 사이에/ 피의 카니발 낭자하다

 

-전비담 시 「그라인다드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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