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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일제 강점기에도 블랙리스트가 있었나?
신도성 경기도음악협회 난파연구위원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17/10/1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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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에 대한 오해와 진실(3)

 

일제 금지 된 노래는

 

홍난파가 작곡한 대표곡은 가곡 ‘봉선화’와 국민동요 ‘고향의 봄’이다. 우리나라 예술가곡의 효시인 ‘봉선화’의 금지곡에 대해서 논하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금지곡은 탄압받은 민족적인 노래로, 금지곡이 안된 노래는 친일의 노래로 인식한다. 이같이 지극히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접근방법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데 필요에 의해 금지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판단기준은 오로지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조선총독부에서 연주나 보급을 금지시킨 노래에 관한 자료로는 1941년 1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조선총독부 금지단행본 목록’이 있다. 책에는 금지를 당한 서적의 제호, 저자 및 편집자 이름, 발행 연월일, 발행지, 처분 연월일, 처분이유만 기록돼있다. 처분이유 란에 주로 ‘치안’이나 ‘풍속’으로 기록됐다. 총독부 경무국은 치안방해되거나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생각되는 악보책을 포함한 서적들을 금지서적으로 정했다. 목록에는 단지 노래책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금지서적이 수록됐기에 어떠한 노래가 금지를 당했는지는 해당서적을 전수조사하지 않는 한 금지곡 여부는 단정할 수 없다.

 

‘봉선화’의 탄생과 금지곡 여부

 

 홍난파는 자신이 쓴 창작소설 ‘처녀혼’에서 첫 장에 사진과 함께 악보를 실었는데 ‘애수’라는 제목의 기악곡이었다. 작품에는 ‘1920년 4월 28일 作’으로 기록돼 있었다. 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아버지 김형준이 후일 이 곡에 ‘봉선화’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붙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봉선화’가 탄생하게 된 줄거리다. 즉 ‘봉선화’는 곡이 먼저 만들어지고 가사가 후에 쓰여진 노래다. 홍난파가 1926년 편찬하고 발행한 ‘세계명작가곡선집’에 이곡을 발표했다. 1927년에는 소프라노 김영숙이 부른 ‘봉선화’가 경성방송국 라디오 방송으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그후 출간된 음악서적이나 경성 방송국의 방송기록과 레코드 음반기 록에 종종 ‘봉선화’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사상탄압이 극심하기 전까지는 금지곡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봉선화=금지곡’은 문서나 자료로서 확인된 경우는 없다. 아이러니하게 해방 이후 ‘봉선화’가 금지되는 사건과 금지곡의 주장이 있었다. 1949년 악극 ‘울밑에선 봉선화’가 극장에서의 상연이 내용이 불온한 점이 있어 경찰에 의해서 중지되고 각본이 압수 되었던 사건이 발생했다. 또 작곡가 금수현이 문교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여학교 교사가 음악회에서 ‘봉선화’를 불렀다고 경찰이 교사를 호출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금수현에 의하면 ‘봉선화’가 일제강점 기에 금지곡이었는데 해방 후인 그때 까지도 경찰서에는 금지곡 리스트가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김천애 ‘봉선화’ 사건은? 

 

작곡가 김세형은 1982년 8월 중앙일보에 ‘나는 증언한다. 우리가곡 금창(禁唱)’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한국 근대 음악의 개척자 난파 홍영후 씨는 1919년 동경에서 일어난 일본 유학생의 독립선언 사건과 관련돼 옥고를 치르고 귀국했다. 홍난파가 1920년대 초 김형준의 시에 붙여 작곡한 것이 유명한 ‘봉선화’인데 애수에 넘친 이 곡조는 망국의 원한을 품은 한국인의 심금을 울려 남녀노소가 애창하게 되자 일본경찰은 ‘봉선화’를 부르는 것을 금지시켰다. 당시 일본 무사시노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음악활동을 하던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씨는 금창곡 ‘봉선화’를 불렀다 해 몇 차례 경찰에 소환당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 다”고 기고했다. 김세형이 홍난파와 같은 시기에 음악 활동을 했고 흥사단에 같이 가입해 활동했던 점으로 보아 그의 주장은 신빙성이 높다. 문서나 공식적인 자료로서 ‘봉선화’가 금지곡으로 지정됐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홍난파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김세형, 김생려, 이유선 등은 일제가 ‘봉선화’를 못 부르게 했다고 이구 동성으로 주장했다. 이유선이 쓴 ‘한 국양악백년사’에 따르면, “난파가 바이올린 곡으로 작곡했던 「애수」 멜로디에 (김형준이) 그 가사를 붙여 본 것인데 잘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어찌했던 간에 이곡은 우리의 백성의 울부짖음의 노래가 되어버렸고 일제는 한동안 부르지 못하게 금창령을 내린 바 있다”고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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