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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수수께끼 그림 김홍도 풍속화 - ⑪ 주막
정조와 김홍도 시대 ‘돈 가뭄’ 전황(錢荒)
 
주찬범 향토작가 기사입력 :  2019/07/2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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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 <<단원풍속도첩>>(일명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에 수록된 풍속화 25점은 국민그림으로 널리 사랑받는다. 하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게 김홍도가 직접 그린 작품인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어 지금껏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실제 전문적인 안목이 없더라도 찬찬히 관찰하면 의문점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매주 화성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상식의 눈으로 <<단원풍속도첩>> 풍속화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풀며 정조와 김홍도가 살았던 시대를 여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주막>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그림1. <<행려풍속도병> 중 <노변야로> 부분, 김홍도, 177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그림2. <<단원풍속도첩>> 중 <주막>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그림3. <<단원풍속도첩>> 중 <주막>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화성신문

 

▲ 트릭. 계획된 신체묘사의 오류 및 비일상적인 상황 설정 

 

①초가막(草家幕)에 주춧돌이 없다. 김홍도의 1778년 작 <<행려풍속도병>> 중 <노변야로>의 주막집에도 주춧돌이 없다.(그림 1)

 

②주모는 오른손으로 그릇을 들고, 왼손으로 ‘구기’를 사용해서 술 혹은 탕을 뜬다. 왼손잡이다. 또한 주모의 새끼손가락이 지나치게 길다.(그림 2) 긴 새끼손가락은 <<단원풍속도첩>>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이기도하다.

 

▲ 잡설 1. 대동 사회 

 

김홍도는 1778년 작 <<행려풍속도병>> 중 <노변야로>(그림 1)에서도 주막집을 그렸지만, 분위기는 <<단원풍속도첩>>의 <주막>과 판이하다. <노변야로> 주막집에서는 양반 혼자 맛있게 식사를 하고, 오른쪽 나무에 기댄 행색이 초라한 사내 둘은 이를 원망스러운 듯 쳐다보며, 주모는 혼자 밥 먹는 양반을 경멸하듯 노려본다. 반면 <<단원풍속도첩>>의 <주막>에서는 상놈도 주머니를 풀어 자기 밥값을 계산한다.(그림 3) 김홍도는 본 작품을 통해 대동사회가 실천된 공간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잡설 2. 정조와 김홍도 시대 ‘돈 가뭄’ 전황(錢荒)

 

상투를 틀지 않은 사내가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찾아 음식 값을 계산하려한다. 하층민 주머니 속에도 동전이 넉넉함은 경제호황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정조와 김홍도의 시대에 그처럼 동전이 흔했을까? 

 

정조는 재임 초부터 돈(동전)이 시장(시전)에서 증발하는 현상인 전황(錢荒)사태를 만성적으로 겪는다. “근래 전화(錢貨)가 너무 귀하다고 한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라고 묻자, 조시위가 아뢰기를, “전황(錢荒)은 도처에서 모두 그러한데,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일성록>> 1781년(정조5) 11월 8일 

 

동전이 사라진 원인은? △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통화량이 증가했다. △예상치 못했던 환곡이자변수가 동전통화량을 흡수했다. 지방기관들이 재정적자를 보충할 목적으로, 환곡제도에 동전을 악용했다. 기아백성을 구제하기 위함이라면, 춘궁기 때 쌀을 빌려주어야 함에도, 상정가와 시세의 차익을 취하기 위해 동전으로 빌려줬다. △고액화폐 기능을 수행하던 은이 고갈(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사치품을 구매하기 위해 중국으로 유출)됨에 따라, 결제수단기능을 동전이 모두 감당했다. △일본산 동수입이 급감하고, 국내광산개발도 부진하자, 동전을 추가로 주조할 원료가 부족했다.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 시장을 장악함에 따라 동전 소유의 쏠림현상이 발생했다. △부상대고들은 벌어들인 동전으로 고리대금업을 했다. 한정된 동전은 돈놀이를 하거나 이자를 지불하는 역할까지 병행하게 됐다. △유통과정에서 분실되고 훼손됐다. △부상대고들과 상인들이 뇌물로 바친 동전은 권력층 장롱 속에서 잠잤다.

 

돈 가뭄현상인 전황은, 시전상인들이 정부에 구제 금융을 호소하면서 공론화됐다. 시장주도권을 사상들에게 빼앗기자 돈이 마른 것이다. 이는 관치경제시대가 저물고, 시장경쟁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전조였다. 동전이 돌지 않으니, 경제전반이 타격을 받았다. 물가 또한 올랐다. 동전의 추가발행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동전을 주조하기 위해서는 재료를 확보해야 했다. 조선은 동의 절대량을 일본에서 수입했다. 재정도 열악했지만, 국부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수입을 최소화해야 했다. 정조의 총신 홍양호(1724∼1802)는 1782년 연행을 다녀온 후, 구리 그릇(銅器) 사용을 엄금하고, IMF사태 당시 ‘금 모으기 운동’처럼, 생활용품으로 사용 중인 동제품 그릇 ·소반과 사발·화로와 냄비·세수 대야와 요강 등을 징발해서, 동전의 원료를 확보하자고 주장했다. 

 

홍양호의 상소에 대해 비변사는, “구리 그릇의 사용을 금지하는 일에 있어서는, 돈 주조(鑄造)에 수용(需用)할 것을 보충하기 위한 것인데, 영구히 사용을 금하게 된다면 소란이 생기게 될 우려가 없지 않으니, 그대로 두기 바랍니다.”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1784년. 정조는 동을 모으라고 지시했다. *<<정조실록>> 1784년(정조 8) 2월 9일 일각에서 화폐가치의 하락을 우려하자, 동전발행을 통해 이익을 취하지 않겠다고 했다. * <<정조실록>> 1785년(정조 9) 10월 14일부터 1787년까지 총 90여만 냥 가까운 동전을 추가로 주조했다.(동제품은 공출하지 않았고, 별도로 재료를 조달했다) 공교롭게도 화성성역비용 87여만 냥에 근접하는 액수이다. 동전발행 이익은, 동 시세에 좌우되지만, 영조시대 선례를 보면 60% 정도의 이익이 발생했다. *<<비변사등록>> 권124 (영조 28) 7월 1일 이재윤, <18世紀 貨幣經濟의 發展과 錢荒>,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797년 정조가 동전을 추가 발행한 이후, 조선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된다.

 

정조가 장용영을 설립한 ‘깊은 뜻’에도 동전발행이 있었다. 화성성역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87여만 냥 소요)이 필요했지만, 확보한 예산은 전무했다. 동전을 추가 발행(90여만 냥 발행)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동전의 재료인 동을 보관하고 주조하는 기구는 군부였다. 지금의 조폐공사 기능도 담당했던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립한 것이다. 정조는 그 과정에서 잔혹한 공포정치를 펼친다. 군부실력자 훈련대장 구선복(1718~1786)과 그의 수하들을 능지처참해 버린다. 군부는 무장해제 당했다.

 

참고로 홍양호의 동 모으기 제안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동전을 주조할 원료조차 없었음에도, 민간에서는 동제품이 널리 사용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는 화폐정책실패가 화석화된 현상이었다. 많은 국왕들은, 특히 세종의 경우는 사찰의 종과 불상까지 녹여 동전을 주조해서 보급했지만, 시장에서 내재가치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동전을 녹여 생활용품을 만들거나, 몰래 일본에 역수출까지 했다. 그렇다면 정조연간 사용 중인 상당수 동제품의 전신은 동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동전이 막힘없이 유통되는 경제는 정조와 김홍도가 꿈꾸었던 세상일 것이다. 

 

주찬범 향토작가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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