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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읽는 세상]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시의 언어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05/1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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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비담 시인. 한국작가회의

““작가님, 저는 글의 힘을 믿어요. 글로써 저희에게 연대해 주세요”

 

10.29이태원참사 유가족 어머님이 만날 때마다 간곡히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글의 힘에 대한 믿음이라니. 글이 무엇이기에 보잘 것 없는 한 시인을 붙잡고 이토록 간절한가. 그는 어이없이 자식을 잃었고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잃었다. 그래서 그 믿기지 않는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차가운 길바닥에 시민분향소를 차렸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공권력과 몸싸움을 하고 ‘마약 검사 대상자’, ‘놀러 가서 죽은 자식 시체팔이’라는 끔찍한 모욕의 언어에 들이받혀 심장이 넝마조각이 된 채 응급실에 실려가야 했고, 이대로 앓아누울 수 없어 열에 뜬 링거줄을 빼버리고 미친 듯이 다시 길거리로 뛰쳐나와 풍찬노숙을 해야 했다.

 

2022년 10월 29일 밤,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서울 시내 한복판 이태원에서 일어났다. 대명천지의 길에서 멀쩡하게 걸어가다가 순식간에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정부는 순식간에 사라진 159명 국민의 생명을 두고 제대로 된 추모의 장 마련, 진상규명, 책임의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참사 200일이 다가오도록 단장지통의 유가족을 길거리에 내팽개쳐 둔 채, 어렵사리 설치한 서울광장분향소에는 수시로 행정집행 예고장과 공권력을 투입하여 그렇잖아도 슬픔에 힘겨운 유가족들이 갈기갈기 찢긴 마음으로 불침번까지 서며 분향소를 지키는 참담한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시인들에게 시와 시인의 존재성을 되묻게 하고, 즉각 당위적 소명의식에 직면케 한다. 정권에 복무하는 죽음만이 기리어지는 사회, 국민의 혈세로 녹을 먹는 공무원이 직무유기로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 국민의 죽음을 쉬쉬 덮으며,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서 다시 대가리를 치켜드는 몰염치 무뢰한의 사회에서 시인과 시의 언어는 어떠해야 하는가. 누군가 다시 울며 북을 울려야 하고 그것은 다시 시인의 몫이 된 것 같다. 

 

삶과 존재의 미학을 탐구하는 동시에 삶과 사회의 모순을 살피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는 화성작가회의 시인들도 이태원참사에서 그러한 몫을 예외 없이 감당하고 있다. 김명철은 ‘세상 천지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로 살아나 ‘저 때문에 심장이 납작해지셨을 사랑하는 아빠엄마 / 두 분이 보고 싶어 제 영혼이 온통 목말라 합니다.’(「이태원, 편지」) 하고 절망에 빠진 ‘아빠엄마’를 위로하는 편지를 썼다. 박소원은 ‘별이 툭 툭 떨어지는 밤/ 하늘의 슬픔이 길바닥을 두드리는 밤’(「좁혀지는 골목」)으로 참사의 골목에 하늘의 슬픔을 포개 따스하게 어루만진다. 전비담은 ‘공무원의 공무는 제대로 아니라 멋대로였다.//일흔아홉 번의 피를 토하는 긴급구조요청 비명을/ 지나가는 무전으로 생각하는 공무원의 공무가 있었다.’(「공무도하公務渡河*」)며 참사 당시 실종된 공무를 비판한다.

 

옛 장례(葬禮) 때에 곡성(哭聲)이 끊이지 않도록 곡(哭)을 하는 곡비(哭婢)가 있었다. 시의 중요한 소명 중의 하나가 바로 저 곡비의 역할이다. 시가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라면 그리할 때에야 닦아주고 치유할 수 있다. 부당한 처지에 처하고 억울해서 우는 울음이 시인을 부른다. 그 울음에 이끌려가서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곳. 이즈음의 시인과 시가 있어야 하는 장소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는 자와 함께 우는 문화예술을 배제하고 탄압까지 하는 이즈음의 현실에서 울음의 힘을 어떻게 모아 이 암울한 조건을 변혁시켜낼 것인가 하는 과제가 늘 병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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