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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성 작가 초대전 ‘금강을 깨우다’
‘금강산’이 지닌 민족의 의미 함축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08/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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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갤러리 초대전

문화일보 갤러리는 한국화가 임진성씨 초대전을 6월 24일부터 7월 7일까지 연다.
‘金剛(금강)을 깨우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지두화(指頭畵) 기법으로 금강산을 그린 작품과 금가루를 사용해 그린 금강산 작품 등 임 화가가 민족 영산인 금강산을 다녀오면서 받은 느낌을 화폭에 펼치고 있다. 
임 화가는 홍익대 동양화과, 홍익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8번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다수의 단체, 기획전에 참여했다.
화성뉴스


금강에 주목하다

   
▲ 금강산군도
임진성은 이번전시에서 금강산(金剛山)에 주목했다. 표면상 여전히 이데올로기 분단국가를 고수하는 한반도에게 있어 1998년 민간기업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금강산관광은 사회적으로 단순한 여행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그 파급효과를 진단하고 주시한다. 그렇다면 예술에 있어 금강산은 어떠한가. 이미 고대로부터 수많은 화가들과 문인들은 그곳을 유희하며 금강의 면면을 그려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분단이후 더 이상 갈 수 없었던 금강산은 창작자뿐 아니라 감상자에게도 매우 진부하거나 이상적인 소재가 되어버렸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을 무렵, 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작품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이내 잠잠해진 것은 소재주의적 한계와 금강산관광이라는 센세이션한 화두가 그 유통기한을 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군내나는 금강산을 그는 왜 다시 끄집어내는가.
그는 최근 민간 구호단체와 함께 봉사를 목적으로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북한마을을 몇 차례 방문한다. 남한인들에게 가장 폐쇄적이고 가려진(반대로 북한인들에게는 일상적인) 민간마을과, 가장 개방된 장소(이제 북한인들에게 가장 제한적인 장소가 되어버린) 금강산을 비슷한 시기에 경험하게 된 작가는 ‘금강산’의 현 사회체제의 이중성과 역사성을 함축한 장소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즉 물질적으로 피폐한 북한인들에게 정신적 쉼터였을 금강산에서 관광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통제되어 근접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금강산으로의 지정학적 이동은 거꾸로 남한인들에게는 반세기 이상 마치 무릉도원처럼 접근할 수 없는 이상적 장소로 여겨졌던 금강산이 이제는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한낱 관광지로 절하되어 버렸다.
   
▲ 임 작가의 작업 모습
물론 통일과 협력이라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금강산관광의 일단(一短)은 그 일장(一長)으로 인해 마냥 신파조의 비판과 울분을 토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이에 임진성은 분단 속 개방이라는 모순으로 야기되는 이 우스꽝스러운 국면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금강산’이 지닌 민족적 의미를 확대하여 화해와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앞서 지적한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화면 안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또한 어떤 방식으로 화해와 해결을 촉구하는가. 첫째는 ‘금강산’ 이라는 소재의 선택이다.
이는 앞 단락에서 그 함축적 의미를 지적했으므로 다음으로 넘어가자. 둘째는 주제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한 기법사용이다. 빠르고 격정적인 지두화를 주로 그렸던 그는 이번 전시에서 금강산을 주제로 지두산수와 함께 금분을 이용한 산수를 선보인다.
금분산수는 주로 그가 사용했던 지두기법에서 탈피해서 이번 주제를 위해 그가 택한 기법으로 검은 먹으로 그려진 풍경(?) 위에 화려한 금분으로 세밀하게 그려진다. 그 형상은 마치 심해나 짙은 어둠 혹은 먹구름 위에 산수가 떠있는 듯한 기이한 인상을 준다.
   
▲ 몽유금강
제목 역시 <부유하는 금강>인데 그렇다면 금강산은 과연 어디를 떠다니고 있는 것일까. 피폐한 북한을 경험하고 온 작가에게 관광특구가 되어버린 지금 금강산의 모습은 그동안 지켜왔던 민족의 영산이라는 타이틀을 내버린 채 한껏 화려하게 치장된 관광지, 즉 생명 없는 박제(剝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동안 지켜왔던 영예에 걸맞지 않는 모습으로, 북한에 존재하나 북한인들의 삶과는 동떨어져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외 없이 등장하는 임진성의 빠르고 격정적인 지두산수는 또 다른 금강을 담아낸다. 지두화는 붓 대신 손가락이나 손톱 끝에 먹물을 찍어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일반 모필과 비교하여 부드럽고 유려한 선의 맛은 덜하고 상대적으로 둔탁한 것이지만 날카롭고 둔중한 필선은 모필의 그것보다 훨씬 강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작가는 금강산을 다시 우리 민족의 이상적 무릉도원이자 박제된 자연이 아닌 같이 더불어 숨쉬는 자연으로 돌려놓기를 희망한다.
그가 그리는 금강산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남북한을 구분하기 이전에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민족을 대표하는 영산으로써의 금강산을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두화로 표현된 둔탁하면서도 거친, 그러면서도 리듬있게 이어지는 산세의 <금강군상도>는 금강에 내재되어있는 원시적 생명, 민족의 혈기, 한반도의 부활을 적절하게 표현해 낸다.
즉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긴 여정 속에서 큰 희생을 치루고 있는 금강산의 형국을 금분산수로, 아울러 금강의 회생과 그 끈질긴 생명력, 숨기고 있는 기백을 지두산수로 이분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 임진성은 기법적인 성취 뿐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를 금강산을 통하여 재해석함으로써 통일의 문제가 단순히 몇몇 의식 있는 사람들의 화두에 머무르는 것을 지양한다. 한국민(韓國民)이라면, 아울러 이번 전시를 보는 관람자라면 국적을 초월해 그 누구나 금강산으로 대변되는 한민족의 생명력과 의식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금강이 차별되는 이유다.

문화일보갤러리 큐레이터 성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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