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 기고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시로 읽는 화성 7]사강리에서 만나는 겨울 시인, 기형도
기형도의 「사강리(沙江里)」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3/12/18 [09:17]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 휘민 시인/ 화성작가회의 사무국장     ©화성신문

기형도는 겨울의 시인이다. 세기말의 우울을 십수 년 앞당겨 살아 내려는 듯 그가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작품 속에는 비애와 죽음이 가득하다. 새하얀 눈발과 진눈깨비가 들이치는, 바람이 많았던 기형도의 겨울 창가. 그곳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누워 있는 아버지와 간유리를 낀 듯 햇볕이 들지 않던 가계,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누이가 있었다. 기형도의 운명을 움켜쥐고 있던 이 절망의 화소들은 이후 그의 시 세계를 이루는 근본 바탕이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손위였던 누이 기순도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기형도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이 사건을 경험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물아홉 살까지 죽음의 빛깔이 짙게 드리워진 채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 판화’ 같은 시를 썼다.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삶을 시흥시 일직리(현재 광명)에서 보냈던 시인. 그런데 이 우수에 찬 젊은 시인의 발자취가 반갑게도 화성에 남아 있다. 송산면 사강리를 배경으로 씌어진 시 「사강리(沙江里)」가 그것이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간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바람이 비탈길을 깎아 흙먼지를 풀풀 날리었다.

 

하늘을 깎고 어둠을 깎고 눈[雪]의 살을 깎는 소리가 떨어졌다.

 

산도 숲속에 숨어 있었다.

 

얼음도 깎인 벼의 밑동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매 한 마리가 산까치를 움켜잡고 하늘 깊숙이 파묻혔다.

 

얼음장 위로 얼굴을 내밀었던 은빛 햇살도 사라졌다.

 

묘지에 서로 모여 갈대가 울었다. 그 속으로 눈발이 힘없이 쓰러졌다.

 

어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위어 있었다.

 

뒤엉켜 죽은 망초꽃들이 휘익휘익 공중에서 말하고 지나갔다.

 

‘그것봐’ ‘그것봐’

 

황톳빛 자갈이 주르르 넘어졌다. 구르고 지난 자리마다 사정없이 눈[雪]이 꽃혔다.

 

- 기형도, 「사강리(沙江里)」 전문

 

 

 

이 시는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아무도 간 사람이 없었다”라는 단호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그곳이 어디일까. 2연에 등장하는 ‘묘지’라는 시어를 통해 유추해보면 그곳은 삶 너머에 있는 죽음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화자는 홀로 누군가의 묘지를 찾아가고 있다. “얼음장 위로 얼굴을 내밀었던 은빛 햇살도 사라”져버린 혹한의 땅, “갈대가 울”고 “눈발이 힘없이 쓰러졌”던 그곳에서 “뒤엉켜 죽은 망초꽃들”을 바라보며 화자는 서 있다. 그날 “사정없이” “꽂히는” 눈을 바라보면 기형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음이란/ 가면을 벗은 삶”이고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겨울·눈·나무·숲」)이라는 깨달음이었을까? 아니면 누이의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자기 구원의 서사였을까? 기형도가 이 시를 쓴 건 1981년 무렵,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성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