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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신문의 전문가 칼럼 화성춘추 (華城春秋)220]
노인과 제도
 
화성신문 기사입력 :  2024/01/1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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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 민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HK연구 교수

운전면허 적성검사 때 일이다. 게으른 탓에 2023년이 얼마 남지 않은 평일 오후에 면허시험장을 찾았다. 500여명의 대기자를 앞에 두고,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 어디선가 고성이 들렸다. 

 

사연인즉, 어떤 어르신이 운전면허증 재발급에 필요한 사진을 너무 옛것으로 가져온 탓이었다. 규정상 6개월 이내의 사진이 필요했다. 담당 직원은 최근 사진으로 다시 가져오시라 안내했고, 어르신은 이것도 분명 내 사진이니 그냥 처리해 달라는 실랑이가 오고 갔다. 

 

족히 4~5시간은 기다렸을 분의 지친 마음과 예전 사진으로는 면허증을 발급할 수 없다는 방침이 생각보다 오래 대립했다. 사실 현장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했다. 하지만 어르신은 자신과 같은 노인에게 신분증 사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면서, 이발도 못한 이런 행색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맞섰다. 기다림에 지친 주변 대기자들의 항의로 이어질 기미가 보이자 관계자 여럿이 나와 어르신을 모시고 사무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르신의 면허증 발급은 이후에 어떻게 처리됐을까? 궁금했지만 피로한 머릿속에서 이내 지워졌다.

 

다음날이었다. 증명서 발급을 위해 행정복지센터에 방문했다.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는데, 맨 끝 창구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엔 뭐지 싶었다. 알고 보니, 노인 한 분이 대중교통비 환급 문제로 소리치고 계셨다. 화성시에서는 무상교통 제도를 시행 중인데, 65세 이상 어르신의 경우 매월 25일에 전월 사용한 교통비를 본인 명의 계좌로 입금 지원해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이 노인분은 하차 시 버스단말기에 전용 카드를 태그하지 않고 이용해 오셨나 보다. 태그되지 않은 기록이 남았을 리 없고, 교통비가 제대로 집계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버스 탈 때만 찍으면 되는 줄 알았지, 자신과 같은 노인이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찍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냐”면서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계셨다. 난감해하는 담당자의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힘들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직원 여럿이 노인 분을 안쪽 어딘가로 안내하는 모습을 뒤로 한 채 그곳을 서둘러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항의하던 어르신들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우연찮게 이틀 연속으로 제도에 대한 노인의 항의를 목격한 셈이다. 내가 보기에 이 두 번의 다툼에서 대단히 잘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긴 어렵다. 노인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던 담당자는 물론이고, 규정과 방침을 지키지 않은 어르신의 항의를 완전히 묵살하기도 어려운 ‘노인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인을 위한 제도에서조차 소외되는 노인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고령이신 분들의 입장에선 제도의 수혜를 얻기 위한 행정적인 절차를 따른다는 것이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닐 테니 말이다.

 

가령 언급한 무상교통 제도만 봐도 그렇다. 교통비를 지원받기 위해서는 인터넷으로 화성시 무상교통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회원가입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 정보를 입력하고 적지 않은 약관에 동의 체크를 해야 한다. 회원가입 전후에 농협에서 G-Pass카드를 발급받아 등록도 해야 하고, 충전도 해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도와줄 자녀(혹은 누군가)와 함께 사는 어르신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한 노인들에게는 얼마나 어렵겠는가? 물론 행정복지센터에 직접 방문하여 그곳 PC를 통해 담당 직원의 도움을 받아 가입하면 될 거라고는 하지만, 일과시간 안에 찾기 어려운 노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노인을 위한 제도에 정작 노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현실이란 게 있다는 것이다.

 

팬데믹 이후, 부쩍 널리 보급된 키오스크 앞에서 눈물 흘리는 어느 노인의 이미지를 TV에서 본 기억이 있다. 이제 혼자서는 커피 한 잔이나 밥 한 끼도 주문해서 먹기 어렵다는 호소였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는데 혼자만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서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사실 키오스크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사용이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떠오른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 영국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복지란 시혜가 아니라 권리이다. 선의로 마련된 제도나 시스템이라고 해도 그에 접근하기 위한 절차에 세대적인 안배와 고려가 없다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행정 절차에 대한 보다 신중한 점검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프랑스의 모럴리스트 라브뤼예르(Jean de La Bruyère)는 자기의 시간을 가장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 대개 시간의 짧음을 불평한다고 했다. 이는 마치 항상 돈이 없다고 불평하면서도 허영과 사치에 돈을 막 사용하는 사람과 같다. 돈의 사용처를 모르는 사람처럼 시간의 사용처를 모르는 사람은 안타깝다.

 

with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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