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민 시인/ 화성작가회의 사무국장 ©화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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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시효가 끝난 것처럼 보이는 ‘거리 두기’는 팬데믹을 겪으며 인류가 경험한 새로운 공생의 방식이었다. ‘자가 격리’ 또한 팬데믹 기간에 우리의 일상을 파고든 새로운 칩거 방식이었다.코로나 감염자 수가 전체 국민의 2/3에 달하니 어림잡아 3천 5백만 명이 팬데믹 기간에 의무적이든 자발적이든 5~7일 동안 병마와 싸우며 홀로 고독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그런데 레비나스는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그 타자가 ‘서로 함께 있음’이라는 본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래서였을까. 홀로 있는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고독한 섬처럼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비로소 나를 둘러싼 관계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지속 가능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 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 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 이재무, 「제부도」 전문
사랑의 본질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를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로 비유한다.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그 거리에서 사랑도 그리움도 생겨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서로를 보듬으며 사랑의 감정을 오래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사랑의 이중성을 새삼 곱씹어보게 된다. 별일 아닌 일로 ‘자주 서럽’지만 또 별일 아닌 일로 ‘자주 기쁜 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랑의 맨얼굴이기에.
요즘도 청첩장에서 흔히 마주하는 문구가 있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었다’는 표현이다. 하지만 어디 그게 가능한가. 둘이 만나 둘로 존재해야 온전한 결혼 생활이 가능한 건 아닐까. 어쩌면 건강한 관계란 서로 겹쳐진 교집합의 넓이가 아니라 각자 본래의 ‘나’로 존재하는 여집합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일 수 있다. ‘나’를 잃어버리면 ‘당신’도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자를 구속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며 서로를 환대하는 상태가 진정한 사랑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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